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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행복 : 주관적 생각

category Self-Improvement/HigherSelf 2018. 8. 22.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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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질적 조건 만이 진정한 행복의 길인가?



    [그림 1]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행복이 부나 건강, 심지어 공동체 같은 객관적 조건에 전적으로 좌우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행복은 객관적인 조건과 주관적 기대 사이의 상관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당신이 손수레를 원해서 손수레를 얻었다면 만족하지만, 새 페라리를 원했는데 중고 피아트 밖에 가지지 못한다면 불행하다고 느낀다. 복권 당첨이든 끔찍한 자동차 사고든 시간이 지나면 행복에 미치는 영향이 비슷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태가 좋아지면 기대도 부풀게 마련이다, 객관적 조건이 극적으로 좋아져도 불만일 수 있다. 상황이 나빠지면 기대가 작아지기 마련이라, 심각한 질병에 걸린 사람이라도 행복감은 이전과 비슷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을 알기 위해 심리학자의 숱한 설문지가 필요하진 않다. 예언자, 시인, 철학자 들은 수천 년 전부터 가진 것에 만족하는 것이 원하는 것을 더 많이 가지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현대의 연구조사 결과에서도 수많은 숫자와 도표의 뒷받침을 받아 옛 사람들과 똑같은 결론이 나온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인간의 기대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은 행복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만일 행복이 부나 건강, 사회관계 같은 객관적 조건에만 좌우된다면, 행복의 역사를 조사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웠을 것이다. 행복이 주관적 기대에 좌우된다는 발견은 역사학자의 일을 훨씬 더 어렵게 만든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현재 얼마나 행복한지, 혹은 과거의 사람들이 얼마나 행복했는지를 추측하고 상상하려 할 때 우리 자신을 그들의 상황에 대입해본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정확하지 않다. 우리의 기대를 타인의 물질적 조건에 끼워넣기 때문이다. 예컨대 현대의 풍요 사회에서는 매일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 것이 관습이다. 대조적으로 중세 농부는 몇 개월간 한 번도 씻지 못했으며, 옷을 갈아입는 일은 거의 없었다. 불결하게 지독한 냄새가 나는 채로 사는 것은 우리 입장에서는 혐오감이 드는 일이지만, 중세 농부는 개의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오랫동안 세탁하지 않은 셔츠의 촉감과 냄새에 익숙했다. 옷을 갈아입고 싶은데 그러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가졌다. 적어도 의복에 관해서는 만족했다.



    주관적 판단에 의해 행복이 좌우된다.



    [그림 2]



    한 불자의 이야기를 해보겠다. 어느 스님의 불자의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스님은 불자에게 좋은 말들을 해주고, 남편을 위해 절을 해주고 불경을 외워주었다. 하지만 불자의 슬픔을 사라지지 않았다. 남편의 장례식장에서 불자와 사람들이 절을 하고 있을 때, 절을 하던 어린이 한명이 참았던 방귀를 뽕하고 뀌었다. 주변 사람들은 웃음을 참으려고 실소를 했고, 남편을 잃었던 불자도 그 상황이 웃겨서 폭소를 하고 말았다. 스님의 조언과 절을 해도 사라지지 않았던 슬픔이 방귀 한번에 사라졌다. 불자는 다시금 정신을 차렸다. "아 남편이 죽었지, 내가 이럴때가 아닌데" 그 생각과 함께 다시 불자는 슬픔에 잠겼다.


    불자의 외적인 환경은 바뀌지 않았다. 남편이 죽었다는 사실 말이다. 하지만 불자는 웃을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불자는 남편이 죽었다라는 객관적인 환경이 아니라, 남편이 죽었다라는 주관적 판단 즉 생각에 의해 자신의 감정이 바뀌는걸 알 수 있다. 남편이 죽었다는 생각에서 방귀소리로 생각이 넘어가면서 즐거운 감정이 생긴 것이다. 객관적인 환경은 우리의 생각에 변화를 주기 때문에 사람들은 즉 외적인 환경에 의해서 행복이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의 감정은 우리의 생각 주관적인 판단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어떤 과학자가 자신은 인간의 지식을 증가시키므로 자신의 삶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하자. 어떤 병사는 자신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싸움으로 삶에 의미가 있다고 하고, 어느 기업가는 새로 회사를 세우는 데서 자신의 의미를 발견한다고 하자. 이들이 찾는 의미가 중세 사람들이 경전을 읽거나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고 새로운 성당을 짓는 데서 찾았던 의미보다 더 환상적인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행복의 관건은 의미에 대한 개인의 환상을 폭넓게 퍼진 집단적 환상에 맞추는 데 있을지 모른다. 자신의 개인적 삶의 의미가 주변 사람들의 삶의 의미와 일치하는 한 나는 내삶이 의미 있는 것이라고 확실할 수 있으며, 그 확신을 통해 행복을 찾을 수 있다.


    학자들이 행복의 역사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우리는 아직 초기 가설을 만들어내고 적절한 연구방법을 찾는 단계에 머물고 있다. 확고한 결론을 채택하고 논의를 마무리 짓기에는 너무 이르다. 논의는 아직 시작조차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역사서는 위대한 사상가의 생각, 전사의 용맹, 성자의 자선, 예술가의 창의성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책들은 사회적 구조가 어떻게 짜이고 풀어지느냐에 대해서, 제국의 흥망에 대해서, 기술의 발견과 확산에 대해서 할 말이 많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개인들의 행복과 고통에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의 역사 이해에 남아 있는 가장 큰 공백이다. 우리는 이 공백을 채워나가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출처 및 참고문헌


    [그림 1] http://moneyamoneya.tistory.com/1241

    [그림 2] https://brunch.co.kr/@rothem/492

    사피엔스 - 유발하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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