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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혼은 존재하는가?


    [그림 1]


     수년간 우리 인간은 영혼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노력했다. 많은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영혼 존재를 주장하며 많은 실험 근거를 내세웠지만 영혼이 있다고 말하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했다. 세계 과학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종교에 대한 믿음은 줄어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믿지 않는 과학의 실증주의 사상이 퍼진 이유 때문이다.


    영혼의 무게 21g


    [그림 2]


     영혼이 존재한다며 내세운 주장은 다음과 같다. 사람이 죽고나서 21g의 무게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임종을 맞이 하기 전 사람을 저울 위에 올려놓고 무게의 차이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죽을 때 몸속에 수분과 오물들이 모든 구멍으로 배출되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받침대에 사람을 눕혀서 저울에 무게를 쟀다. 그리고 몸에 있는 숨 또한 사람이 죽으면 나가기 때문에 죽은 자 폐에 공기를 주입하여 죽기 전 상태의 공기량으로 만들어 무게를 측정했다. 해당 연구 결과에 따르면 여러 임종에 대해 다음과 같은 실험으 진행하였고 역시나 죽기 전과 후에 21g의 무게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영혼이 있다고 주장한 여러 과학자들이 이를 토대로 많은 기사화를 시켰다. 하지만 이는 오래가지 못해 반대 입장의 과학자들에게 반박을 당하였다. 일단 영혼의 정의 자체가 비물질적인 영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비물질을 무게를 통해 측정하려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무게가 줄어들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말하는 영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위와 같은 실험을 반대파에서 재현을 했을 때 21g의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임사체험


     임사체험이란 죽은 후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한다. 하나같이 그들은 어두운 긴 통로 끝에 빛이 있고 그곳을 향해 걸어간다고 말했다.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사후세계로 가는 문이라고 말하며, 이러한 현상이 곧 영혼의 세계가 있음을 주장했다. 하지만 영혼이 없다고 주장하는 과학자들의 입장을 조금 달랐다. 단순히 죽기 전 뇌의 환각을 통해 본 기억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지 않겠다.


    셸리케이건의 입장


     셸리케이건은 이원론(육체와 영혼이 따로 존재한다는 이론)과 물리주의(육체만으로 이뤄진 인간)에서 물리주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셸리케이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혼은 없다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영혼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영혼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근거가 설득력이 없다고 말하기 때문에 영혼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물리주의 입장을 취한다". 셀리케이건 처럼 필자도 같은 입장에 서있다. 그러기에 다음에 나오는 죽음에 대한 이성적 풀이는 인간이 육체만으로 이루어져있다는 가정하에 진행하겠다.


    죽음은 정말 나쁜 것일까?


    [그림 3]


     죽음이 우리에게 나쁜 것이라면 죽음을 두려워 하는 것이 맞지만, 그렇지 않다면 두려움은 잘못된 감정이라는 것이다. 만약에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해보자. 죽음이 우리에게 나쁜 것일까. 죽으면 외로움도 못느끼고, 고통, 괴로움 또한 느끼지 못한다. 즉 자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없기 때문에 죽음 후는 어떠한 괴로움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이 정말 우리에게 나쁜것일까?


     죽음이 나쁜 또 다른 이유로는 겁탈이론으로 설명될 수 있다.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모든 이익들을 죽으면 느낄 수 없기에 죽음이 두렵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맞다. 내가 죽으면 가족도 못보고, 맛있는 음식도 먹지 못하고, 재미있는 책도 읽지 못할 것이다. 그러기에 죽음은 두렵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반대로 영생은 좋은 것일까? 영생이 좋지 않다면 우리는 죽음 자체가 나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영생은 좋은 것일까?


    [그림 4]


     영생은 우리에게 좋은 것일까? 영생이란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에서도 천국에서 영생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지 않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정말 영생은 우리에게 행복함을 가져다 줄까? 조금만 생각해보자. 만약 자신이 게임을 좋아 한다고 생각해보자. 우리는 영생을 살게 되었다. 게임만 1년동안 한다고 생각해보자. 생각만해도 즐거운가? 어떤 게임을 할까 고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영생은 1년도 아닌 10년도 아닌 무한대의 삶을 말한다. 게임은 무한대로 한다고 해보자. 즐거운가? 게임말고 다른것들 여러가지를 하다보면 즐겁다고 말할 수 도 있겠다. 그렇다고 가정해보자. 다양한 일들을 해본다고 해보자. 그래도 우리의 수명은 영원하다. 정말 즐겁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행복한 삶을 평가하는 방법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해보자. 행복수치를 1~100으로 나타낸다고 했을 때, 우리 삶은 2차원의 그래프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80년의 삶을 100의 행복지수를 산다면 행복의 양은 8000이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행복의 양을 구한다고 생각해보자. 만약 90년을 100으로 살았을 때와 3만년을 행복지수 10으로 살았을 때 어느 삶을 살고 싶은가. 행복의 양은 9000과 300000이다. 아마도 선택은 전자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단순히 오래사는 것이 아닌 행복의 질을 추구한다. 짧은 인생이라도 행복하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결국 죽는다. 영생을 산다고 해도 영생 자체가 행복하지 않음을 알았다. 그렇다면 유한한 삶에서 우리는 어떤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 DEATH에서는 유사영생(영생과 비슷한) 에 대해 두 가지를 말했다. 첫번째는 우리는 죽지만 우리가 만든 가치는 세상에 영원히 존재하므로 가치있는 삶을 사는 것이다. 동물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처럼 우리 선조가 만든 세상의 유익함이 모여 현재 우리의 삶이 되었다. 두번째는 우리의 DNA를 남겨 유사영생을 사는 것이다. 우리가 죽었어도 우리의 DNA는 자식 그리고 후손들을 통해서 계속해서 남아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유사영생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에 더 나아가서 얘기를 해보면, 우리의 몸은 원자로 되어있다. 임신과 출산을 통해서 우리가 만들어졌고, 우리의 몸을 구성하는 원자는 본래 자연속으로 부터 얻은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죽어서 땅으로 가는 것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몸을 구성하는 원자들이 원래 있던 곳으로 즉 자연으로 돌아가고 그 원자들은 우주 어딘가에서 계속 존재하므로 유사영생을 사는 것이다. 셸리케이건은 첫번째 유사영생을 산다고 말했다. 하지만 필자는 두번째 유사영생을 살고 싶다. 마치 바다에 파도가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 처럼 우리의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다. 즉 땅에서 왔고 다시 땅으로 가는 것. 우리는 산것도 죽은 것도 아닌 단지 형태만 변화했음을 말이다. 우리의 본질의 모습은 원자 더 나아가 입자의 모습이란 것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참고자료


    [그림 1] https://mblogthumb-phinf.pstatic.net/MjAxNjEyMjRfMTc2/MDAxNDgyNTEyMTI5MTA2.QP_uzdNG70hdjgcEzb_Bhl_rLlST_mvJqD-XbHNXIdMg.hSzENX6VQC-D7jU8A3Jxf18U3lZo6rgY2nLVXAVvl-sg.JPEG.ian3714/%EC%8B%AC%EB%A6%AC%ED%95%99%EC%98%81%ED%98%BC.jpg?type=w2

    [그림 2]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panta98&logNo=220451191263&categoryNo=1&proxyReferer=&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kr%2F

    [그림 3] https://www.unnibege.co/signs-of-our-bodies-when-death-is-approaching/

    [그림 4] http://1stdream.com/letter_to_titus/32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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