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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토불교대학에 입학하여 어느덧 정토불교대학 경전반을 졸업했다. 정토불교대학을 다니는 2년동안 나에겐 많은 변화들이 생겼다. 긍정적인 변화들이었다. 이전에 나의 모습을 잊을 정도로 지금의 나는 예전과 달랐다. 정토불교대학에서 함께 수행을 하며 불도의 길을 걸어준 도반들에게 감사하다. 경전반 졸업식을 맞이한 도반들도 이전과 다른 변화가 선명하게 보인다. 나와 도반들은 자기의 마음을 이해하고 감정을 다스릴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평안이 깃들어 보인다. 정토불교대학에서 많은 이론들을 공부한 것은 아니었다. 정말 명료하게 내 마음이 지금 어떤지 살펴보는 수행을 하였다. 밖을 향한 눈을 안으로 향하게 하는 작은 변화였지만 그 시작은 행복한 인생에 큰 시발점이 되었다. 행복한 권리, 우리에게는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다. 누구나 행복할 수 있다. 내가 어떤 환경에 있던지 어떤 경험을 가지고 살았던지 우리 모두 행복해 질 수 있다. 먼 미래가 아닌 바로 지금 여기서 말이다.

    정토회는 종교가 아니다.

    정토회는 종교가 아니다. 맨 처음 입학하면 정토회의 설립 목적을 설명해준다. 정토회의 의미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수행 공동체' 이다. 수행이라고 하면 종교적 색채가 있어 보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수행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도법사님은 미디어에서 자주 출연하셨던 법륜스님이다. "스님이니까 종교 아니냐?"라고 할 수 있지만 불교의 근본은 종교가 아니다. 다시 풀어서 이야기하면 믿음의 종교는 아니다. 종교에는 두가지 성격이 있다. 1. 지혜로써의 종교 2. 믿음의 종교다. 믿음의 종교는 우리가 보편적으로 아는 전지전능한 신을 믿고 그에게 기대어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이다. 정토회는 지혜로써의 종교로 자신의 무지를 깨우쳐 깨달음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 법륜스님은 복을 비는 믿음의 종교가 아닌 부처의 근본 가르침을 전파하고자 정토회를 설립하셨다.

    무엇을 배우는가?

    정토불교대학에 입학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운다. 불교대학에서는 어렵고 추상적인 불교 가르침을 실생활 쉽게 적용할 수 있도록 가르쳐 준다. 경전반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록한 경전을 읽고 공부한다. 불교대학에서는 '실천적 불교사상', '부처님의 일생', '근본 불교', '불교의 변천사' 이렇게 4개의 과목을 수강하게 된다. 실천적 불교사상에서는 마음을 살펴보고 긍정적 사고를 할 수 있게 도와준다. 환경실천 수행도 하며 내가 가진 것에 대한 소중함을 알고 아껴쓰는 방법들도 배운다. 부처님의 일생에서는 부처님의 생애를 관찰하며 부처님이 걸어온 길을 통해서 배워야할 점이 무엇인지 배우게 된다. 근본불교는 사성제, 인과법, 고집멸도등.. 열반과 해탈에 이르기 위한 근본불교 사상을 배우게 된다. 주관적으로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과목이다. 그리고 불교의 변천사를 통해서 소승불교, 대승불교, 선불교, 원불교등 각 종파가 나눠지게 된 이유와 각 종파가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깨달음의 순간들

    마음의 이해

    불교대학을 입학해서 배운 내용들을 이해하고 집에가서도 곰곰히 생각했다. 사실 자기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분석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나이를 먹으면서 배운 지식과 경험들이 나의 행복의 척도가 되었고 그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 인생의 끝이라고 했다. 행복은 밖에 있는 것이고 그것을 얻기위해 노력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바라던대로 되면 행복한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불행한건 당연하다 생각했다. 불행은 제거하고 행복을 만들어가는게 인간이 아닌가라고 말이다. 정토불교대학에 입학하면 알겠지만 '행과 불행은 모두 마음이 짓는다.'라고 한다. 수행을 하면서 마음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내가 어떨때 마음이 들뜨고 어떨때 마음이 슬픈지 살펴보았다. 살펴보는 것을 잊어버릴 때도 있지만 그때 다시 알아차리고 일상속에서 마음을 살펴보는 수행을 지속했다. 한달 혹은 두달의 시간이 지나고 마음에 대해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감정이 요동칠 때 마다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 살펴보는 것이 습관이 되었고 감정을 살펴보는 중에 이미 그 감정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니 감정이 요동치는 날이 줄어들고 마음은 점점 평온해져갔다. 내가 누군가 앞에 서있을 때 오는 떨리는 감정은 내가 타인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었고, 누군가 나에게 싫어하는 말을 할 때는 내가 나쁜 사람이 되기 싫어하는 마음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내가 가진 여러 감정들을 살펴보고 이해하는 것 만으로도 마음의 평온함을 찾을 수 있었다.

    연기법, 인연과

    사실 내가 마음을 이해했다고 해서 내가 원하지 않는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가끔 돌이킬 수 없는 큰 괴로움이 오면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괴로움은 지속되었다. 완전한 마음의 이해가 아닌 듯 하였다. 그러던차에 연기법과 인연과를 배우게 되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이 없다.' 처음에는 추상적이어서 '그렇구나' 이해하는 것 같았지만 결국 다시 들어도 생소한 그런 가르침이었다. 하지만 법륜스님의 법문을 듣고 '아'하고 이해한 순간이 있었다. 세상은 분자 더 작게는 원자, 양성자, 중성자, 소립자로 이렇게 작은 것들이 연결되어 이루어져 있다고 설명해주었다. 모든 사물들은 연기법을 통해서 생성된 결과물이며, 이런 사물들은 인연과에 의해서 계속해서 변화를 하여 실제론 실체가 없고 단지 변할 뿐이라고 말이다. 공의 개념이었다. 이과와 공대를 나온 나에게는 추상적이고 피상적인 개념보단 과학적 관점에서 사물을 이해하는 것이 더 쉽게 다가왔다. 이를 이해하고 법당을 둘러보니 모든게 생소하게 느껴졌다. 법당의 부처님을 보면 신성함이 느껴졌었고 목탁을 보면 편안함이 느껴졌었다. 법당은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연기법과 인연과를 깨우친 순간 법당은 어떤 느낌도 느껴지지 않는 그저 그런 상태로 변해 버린 것이다. 상을 내려놓게된 순간이다. 상을 내려놓으니 좋고 싫음이 모두 마음이 짓는 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마음의 이해 뿐만 아니라 현상을 바로 보게된 순간 온전한 평온의 상태를 경험할 수 있었다.

    일체유심조

    상이란 영원불면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마음에 존재하게 된다. 혼돈의 카오스 같이 명확하지 않고 어둠에 가려진 세상속에서 동물이 생존하는 방법은 상을 짓고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다. 12연기를 보면 무명, 행, 식, 명색, 육처, 촉, 수 , 애, 취, 유, 생, 노사 순이다. 캄캄한 무명한 세상에서 육처를 통해 좋고 싫음을 구별하고 그것이 행동과 생각으로 자리 잡는다. 그러기에 생과 죽음이 존재한다고 정의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 단지 인연에 따라서 변할뿐 생과 사는 단순히 우리 생각속만 존재하는 상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 상을 짓게 된 것이다. 여지껏 알아온 모든 생각들이 한꺼번에 뒤집히고 섞이고 비워지게 되었다. 기존에 있던 상들을 버리고 온전히 연기법과 인연과로 세상을 다시 이해하려는 시간들을 가졌다. 선과 악의 개념, 도덕, 철학, 문화, 심리까지 시험을 위해 달달이 외웠던 내용들을 이제는 깊이 탐구하고 생각하며 재정립하는 시간을 수행하는 기간동안 계속해서 지속했다. 그러다보니 단순히 외우기만 했던 내용들이 왜 그렇게 이어졌는지 그리고 우리가 왜 이렇게 인생을 살아가는지 모든게 이해되었다. 세상이 전보다 더 명확하고 쉽게 다가왔다. 나는 그렇게 무명에서 명으로 밝아진 세상을 맞이할 수 있었다.

    법에 귀의하고 생겨난 변화

    그 전에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회상해 보자. 나는 남들을 의식하는 사람이었다. '저 사람 눈에는 내가 어떻게 보일까? 이런 말을 하면 싫어하겠지? 이런 행동을 하면 좋아할거야.' 누군가 나를 싫어하면 괴로워 했고, 누군가 나를 좋아하면 기분이 좋아 들떴다. 늘 이렇게 나의 감정은 타인의 반응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러다 보니 내 감정의 주인은 내가 아닌 타인이 되어버렸다. 늘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 노력했고 내가 피해를 봐도 조용히 넘어갔다. 그게 나였고 나의 성격이었다. 학업에서는 나름 이해력도 좋고 암기력도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도 대학교 졸업까지였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니 그전에 하던대로 공부해서는 업무를 처리할 수가 없었다. 사회는 배워야할게 많았고 변수도 너무 많았다. 그러다보니 상사가 업무를 주어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기 일 수 였고 결국 첫 직장은 얼마가지 않아 퇴사를 하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 정토불교대학을 입학하게 되었다.

    열반, 괴로움이 없는 상태

    수행을 통해 마음을 이해하게 되면서 왜 이런 감정이 생겼는지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명확하게 보였다. 그러다 보니 잠시 괴롭다가도 내가 가진 한 생각을 바꾸어 다시 평온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들쑥날쑥한 나의 마음은 이제는 잔잔 호수 같이 평온하다. 이전에는 회사가 상사의 꾸짖음을 들을 때는 쪽팔리고 무섭고 두려운 감정에 잠식당한 나의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평온한 마음으로 그가 나를 꾸짖는 목적과 그의 감정상태를 살필 수 있게 되었다. 상사의 마음을 이해하는 순간 어떠한 미운 감정도 들지 않았다. 정말 누군가 악의적으로 나를 싫어할 때도 '그럴 수 있지 뭐, 모두가 날 좋아한다는 한 생각이 잘못된 거니까'하고 그러려니 한다. 어떻게 보면 긍정적 사고라고 볼 수 있지만 좋고 싫음을 떠난 객관적 상황 인식이 더 맞는 표현인 듯 하다.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면 인연에 따른 것이라 신기할 것도 없고 좋아할 일도 아니란 걸 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해서 괴롭지도 않다. 다만 세상은 인연에 따라 변할 뿐. 이렇게 마음에 어떠한 상도 짓지않고 다만 인연에 따라 사는 수행자의 마음은 평온하다. 그 어떠한 걸림이 마음속에 없음을 안다.

    해탈, 자주적인 삶

    연기법과 인연과를 이해하고 나서는 자주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나의 한계를 정해놓고 그 범위 안에서만 살았던 나는 상을 버리고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위해 해야할 일들을 차근차근 실행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일련의 변화들이 필요하고 일련의 변화들이 인연과 맞아떨어졌을 때 과실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그 인연을 잘못파악하여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 때도 많았지만 이것 또한 인연일지어니하고 태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선천적 한계, 후천적 상황들을 탓하며 항상 불만만 가득했던 나지만 이런 상황속에서도 좀 더 나은 삶은 살 수 있게 하루 하루 지금 이 순간 살아가는 내 모습을 보니 정말 내가 변했구나 하고 놀랄따름이다. 스님의 말처럼 안되면 또하고 또 안되면 또하고 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실패했었도 마음은 평온했고 실패 원인을 분석하여 다시 시도할 수 있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장애물들이 무서웠던 나지만 이젠 장애물은 어디에도 없다. 여지껏 부딪힌 장애물은 내가 만든 것이니 말이다.

    수행자의 길

    난 계속해서 이 길을 걸어갈 것이다. 부처님의 법을 만나 귀의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이 든다. 아직도 가끔 상에 집착하여 괴로움에 빠질때도 있지만 앞으로 10년 20년 수행을 계속한다면 점차 좋아질 거라 생각한다. 나뿐만 아니라 주변 지인들이 괴로움에 빠질때도 부처님의 법을 비춰주려고 한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처럼 보리심을 가지고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산다면 나는 지금 보다 더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만이 자유로운 삶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분명히 안다. 답은 밖이 아니라 안에 있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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